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수단 내전 (문단 편집) == 배경 == 북수단과 남수단은 19세기 이전까지는 단일한 국가를 구성한 적이 없었다. 남수단 일대의 문화와 식생은 오히려 [[케냐]]와 유사했으며 북수단은 문화적으로 이집트와 공통 분모가 많았다. 그러나 북수단과 남수단은 중세부터 경제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는데, [[수단 아랍인]]들의 주 수입원 중 하나가 남수단의 흑인들을 약탈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단에서의 상아 채집은 직접 아랍인들이 코끼리를 사냥할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아랍인 코끼리 사냥꾼들이 남수단 일대의 쉴룩족, [[누에르족]], [[딩카족]] 마을에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고문해서 상아를 받아내는 일이 더 많았다. 전근대 수단은 도로 시스템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고 결국 노예 사냥꾼들은 노예가 된 마을 주민들을 직접 도보로 상아를 들고 나르게 시켜 상아와 노예를 함께 수출하곤 했다.] 19세기 초 알바니아 출신으로 이집트의 태수가 된 [[메흐메트 알리]]는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이 과정에서 아랍인들과 경제가 긴밀히 엮어 있었던 남수단 일대까지 정복하기 이른다.[* 북쪽으로는 오스만 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까지 정복하였으나, 서구 열강이 오스만 제국이 갑자기 무너지면 뒷감당이 힘들다고 이집트에게 정복한 영토를 반환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수단은 유럽 열강이 개입하기 다소 애매한 위치였고, 이집트의 영토로 한동안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국이 되면서 해당 지역은 '''영국과 이집트의 이중 식민지인 [[앵글로-이집트 수단]]'''이라는 식민지 행정 구역이 되었다. 앵글로-이집트 수단은 이집트의 입김을 받아 아랍어가 주로 사용되었고 아랍인들이 우대받던 체제였다. 한 편 토속신앙을 믿던 남수단 주민들은 영국인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북수단과 남수단은 이슬람 대 기독교 구도로 양분되었다. 앵글로-이집트 수단이 수단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남수단의 [[누에르족]]과 [[딩카족]] 등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실세를 잡은 북수단의 [[수단 아랍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남수단 흑인들을 탄압하는데, 이는 수십여 년에 걸친 제1차 수단 내전으로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